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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우리나라 최초 국기(태극기) 원형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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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우리나라 최초 국기(태극기) 원형 공개
  • 미디어몽구
  • 승인 2008.02.2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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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프레스센터 기자클럽에서 독립기념관이 .1절을 기념해 지난 2월초 우리나라의 상징인 최초의 국기(태극기) 원형을 영국국립문서보관서에서 확인 발굴, 공개했습니다.

그동안 국기의 원형과 관련해서 여러 논란이 있어 왔는데요. 이번에 독립기념관에서 최초 국기원형이 공개 됨으로써 국기 원형을 둘러싼 논란이 결말을 맺게 됐고 또한 국기에 대한 정확한 유래와 자부심을 갖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태극기는 1882년 박영효 선생님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바로 그 태극기 원형을 그대로 그린것으로 1882년 11월 1일 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차관)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첨부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이 밝혔습니다.

이번 국기 원형은 현재 태극기와 같이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이의 사쾌를 그렸으며 원형의 원래 크기는 142.41cm, 세로 115.14cm , 태극기의 지름 81.81cm 입니다.

이번 국기 원형 발굴의 경위에 대해 독립기념관측은 동국대학교 역사교육과 한철호 교수가 태극기를 연구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국국립문서보관소에 있음을 확인하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연구소와 공동으로 발굴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1절을 맞이해 이번에 발굴한 최초 국기 원형과 다른 역사 태극기들을 대형으로 제작하여 .1운동 계승 재현 행사에서 일반에 공개 한다고 하네요.


다음은 독립기념관에서 나눠준 자료인데요. 이 국기가 왜 최초의 국기인지에 대한 증거를 그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첫째,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의 작성일 1882년 11월 1일자로 적혀있다. 이날은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기간과 일치한다. 박영효의 '사화기략'에 의하면 그는 10월 1일 도쿄에 도착한뒤 12월 27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박영효는 9월 25일 영국인 제임스 선장의 자문을 구해 '태극 4쾌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기로 결정하고 10월 일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 하였다. 이후 그는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이 국기를 내걸었다.

둘째, 태극기와 함께 동봉된 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요시다 외무대보가 "몇일전 귀하[해리 파크스]의 구두 요청에 따라 조선의 국기 사본을 동봉"한다고 밝히고 있다. 박영효가 10월 일 국기 제정을 정부에 보고하는 서한에서 "영국,미국,일본,독일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려 가기를 청하니, 이것은 천하에 알려 밝히는 데에 관련된것"이라고 기록했던 사실로 미루어, 방문 당사국인 일본 외무성이 박영효가 제작한 태극기 2본 (대,중)가운데 하나를 그려 놓았고, 이를 다시 파크스의 요청으로 사본을 만들어 보내준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셋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박영효는 9월 25일에 "새로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감.이.의 사쾌를 그렸다"든가, 또 10월 일 보고서에서도 국기 제정을 의논했던 제임스 선장이 "태극.팔쾌의 형식은 특별히 뛰어나 눈에 띄이지만, 팔쾌의 분포가 자못 조잡하여 명백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며, 또 각국이 이를 모방하여 만드는 데 있어서도 매우 불편하니, 다만 사쾌만 사용하여 네 모서리에 긋는다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고 말한 사실을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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